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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교육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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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33여명기,黎明期

    축구 지도자를 위한 특별한 교육이 존재하지 않았고, 축구를 경험한 교사나 선규사들이 축구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

    축구에서 감독(監督)을 지칭하는 영어 표현이 여전히 “manager(總務, 혹은 主務를 의미)"로 남아있는 것에서 보듯 초창기 축구 역사에서 지도자와 선수의 경계는 매우 모호했다. 이는 대한민국으로 전래된 ‘아식축구(당시 럭비축구와 구분하기 위해 쓰인 용어)도 마찬가지였다.

    대한제국에서 축구의 보급은 관립외국어 학교의 체육과목에서 유래한다. 때문에 초기에는 축구 지도자를 위한 특별한 교육이 존재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경우 축구를 경험한 교사나 선교사들이 축구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때문에 초창기 축구계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린 지도자들은 대개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한 예로, 1928년 일본 고시엔에서 열린 ‘전일본 중등 축구대회’에서 우승, 조선 축구의 기개를 떨친 숭실중학교 축구단의 강봉우 감독은 함흥 출신으로 일본사범대학을 졸업한 교사였다. 이들의 역할은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지도자라고 하기 보다는 어의(語義) 그대로 'manager'의 역할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팀을 조직하고 이끌지만 전술이나 훈련에 대해서는 자신의 지식보다는 선수들의 자율과 협동에 어느 정도 맡겨두는 초기 축구지도자는 그래서 교사 출신이나 기독교 선교사 출신이 많았다. 때문에 교회 장로였으며 교사이기도 했던 강봉우 선생은 한국 축구 여명기의 축구 지도자의 전형이었다고 할 것이다. 참고로 강봉우 선생은 생전의 독립운동을 인정받아 사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 1933~1945맹아기,萌芽期

    대한축구협회 정식 설립

    대한축구협회의 전신인 조선축구협회가 정식으로 설립된 것은 1933년 9월 19일.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축구의 보급과 교육이라는 개념이 도입되기 시작한다. 특히 1938년 7월에는 조선축구협회 최초로 축구 강습회를 개최, 다케노코시 시게마루(竹腰重丸) 당시 일본협회 기술위원장을 초빙, 2주간 강습회를 진행하였다. 당시 강습회는 심판과 지도자가 혼재되어 있었고 강습생 역시 직업적인 축구 지도자라고 하기 보다는 대부분 현역 선수들이 그 대상이었다.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강습회의 대체적인 커리큘럼은 體操(워밍업), 走法(코디네이션), 개인기술, 기초기술(볼 기술), 연락(패스), 전술, 부분 연락(부분 패스), 유기적 총원(팀 전술) 등 축구 전반에 대한 강의는 물론, 지금의 비디오 분석과 같은 지도영화(指導映畵, 축구 지도와 관련된 영상) 관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비디오 분석은 이미 1930년대부터 축구의 중요 강의 기법으로 활용되었다.

    한국 축구 1호 외국인 강사인 다케노코시 시게마루씨는 여러모로 한국 축구의 발전과 관계가 깊은 인물이다. 그는 오이타 출신으로 동경제국대학 농과대학을 졸업했으며 베를린 올림픽 일본대표팀의 선수 겸 코치로 참가한 경력이 있었다. 한국 축구의 아버지로, 당시 일본대표로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김용식 선생과는 팀 메이트였던 셈. 다케노코시 감독은 이 후 일본대표팀 감독에 취임하게 되는데 이 때도 김용식을 선수로 소집하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하다. 김용식은 다케노코시가 베를린 올림픽 때 그러했듯 1948년 런던 올림픽에 대한민국 대표팀의 선수 겸 코치(사실상의 감독)로 참가하게 된다. 이 후 지도자의 길을 걸어 대표팀 감독까지 역임한 김용식 선생이 사후 체육훈장 맹호장에 추서되고 2005년 한국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었듯이 다케노코시 시게마루 역시 일본의 훈장인 서보장(瑞宝章)을 수여받았으며 사후 일본 축구 전당에 헌액되었다.

    축구의 질적 향상과 발전을 위한 이러한 조선축구협회의 노력들은 1941년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함께 일변한 조선총독부의 스포츠 정책으로 인해 긴 겨울잠에 들어가게 된다. 1942년 2월 14일 조선총독부가 조선체육진흥회라는 관제 체육단체를 구성하여 조선축구협회를 편입시키려 하자 조선축구협회는 이에 반발, 그 결정에 불복하고 2월 22일 자진 해산해 버린다.

  • 1945~1950해방기,解放期

    1948년 9월4일 대한축구협회로 개칭하며 새로이 출범

    대한축구협회는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조선축구협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다 1948년 9월 4일 대한축구협회로 개칭하며 새로이 출범하였다.

    마침 FIFA에 가맹한 1946년, 런던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첫 올림픽의 개최지로 선정되면서 올림픽 축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라디오에서 ‘올림픽 출전의 축구 조선, 실력과 사명’ 이라는 제목으로 특집 대담 방송을 만들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의 축구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1948년 4월20일부터 3일간 동대문운동장에서 진행된 런던 올림픽 후보 선발 축구전은 열혈 팬의 경기장 난입으로 경기가 중단되는 등 유럽이나 남미에 버금가는 축구 열을 보여주기도 했다. 정부 수립 이후, 올림픽은 한국 축구의 새로운 르네상스를 가져오고 있었다.

    특히 1930년대를 마지막으로 명맥이 끊겼던 현재의 K리그의 원류(原流)라고 할 수 있는 전국도시대항축구대회가 재개되었고, 이 덕분에 한국 축구 역사 최고의 지역 라이벌 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경평축구(京平蹴球)가 마지막 불꽃을 태울 수 있었다. 게다가 이제 막 수립된 대한민국을 응원이라도 하듯 국가대표팀의 친선경기 요청이 홍콩 등지로부터 날아들고 있었다. 가히 한국 축구의 르네상스라고 할 만하다.

    이미 1948년부터 대한축구협회는 지도자 강습회를 전국에서 수시로 개최하고 있었다. 구체적인 커리큘럼과 참가자에 대한 자료는 6.25 동란으로 유실되어 그 자세한 내용을 알기 힘들지만 남아있는 자료로 당시 지도자 강습회의 존재를 확인 할 수 있다.

    1949년 새로이 출범한 윤보선 회장(후에 대한민국 4대 대통령) 집행부는 매우 정력적으로 축구 발전을 위한 사업들을 기획하였다. 특히 윤보선 회장이 영국 에딘버러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배경도 있어, 대한축구협회는 “축구지도자 강습회 및 하기 합동 연습”을 1950년 8월16일부터 30일까지 2주간 개최하기로 공표하기도 하였다. 지금으로 치자면 지도자 강습회와 필드 세미나를 기획한 셈. 2주라는 기간도 현재의 강습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해방 이후 찾아온 축구 르네상스기의 마지막 지도자 강습회 일정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1950년 6월25일, 북괴의 남침으로 인해 발발한 6.25 동란은 해방 후 발전의 길을 걷던 한국축구를 전쟁의 참화 속으로 밀어 넣어버렸다.

  • 1950~1960재건기,再建,期

    1958년부터 대한축구협회 연례 사업으로 1년에 1회, 전국지도자 강습회 개최

    전쟁은 친선과 우정, 평화와 공존의 축제인 축구를 존폐의 위기까지 몰아넣는다. 하지만 불굴의 한국 축구는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참가, 1956년, 1960년 1회와 2회 아시안컵을 우승 등, 안으로는 전쟁의 참화에 지친 국민들을 위로하고 밖으로는 국위를 선양하는 그 역사적 소임을 묵묵히, 그리고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는 1945년부터 전쟁 직전까지 있었던 한국 축구의 인기가 낳은 저력이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재건하던 시기, 게다가 재정조차 열악했던 대한축구협회. 국민들은 전후의 피폐함에 지쳐 있었다. 스포츠와 관련된 활동은 거의 휴지기(休止期)에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명맥을 유지하던 국가대표팀은 민간외교의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민간 차원에서 한국축구의 수준이 1950년 이전을 회복하기에 전후의 환경은 가혹하기만 했다.

    하지만 대한축구협회는 FIFA의 도움으로 체계적인 지도자 교육의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1955년 9월5일부터 8일까지 스위스에서 열린 세계축구지도자 회의에 대한축구협회 기술지도위원(현재의 기술위원, 지도자 강습회 강사에 해당) 임창식(林暢植)씨를 파견, 세계 17개국에서 모인 기술위원들과 교류하며 대한민국을 알렸음은 물론 유럽의 발전한 축구 지도법을 도입하고자 노력하였다.

    1958년부터는 대한축구협회의 연례 사업으로 1년에 1회, 전국지도자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이 무렵의 지도자 교육의 특징 중 하나는 민간의 축구팀은 거의 대부분 사라지고 중학교, 고등학교 축구팀들이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학교 교원들을 상대로 하는 강습회들이 열렸다는 것이다. 또한 강습회 개최 기간도 연휴가 있는 5월이나 여름방학인 7월에 열린 것도 특징이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축구의 기술적 발전과 보급을 위해서는 저명한 코치나 이론가를 외국에서 초빙하여 국내에서 강습회나 연구발표회(현재의 세미나, 혹은 컨퍼런스)를 열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여론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게다가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축구협회가 서독축구협회의 도움으로 1960년 데트마어 크라머씨를 기술고문으로 위촉하자 한국 축구계에서는 이러한 의견이 더욱 공고해져갔다.

  • 1961~1969냉전기,冷戰期

    1960년대는 북한과의 냉전구도가 더욱 심화, 외국인 지도자 초빙 문제가 축구계의 중요한 화두로 대두

    1960년대는 북한과의 냉전구도가 더욱 심화되던 시기였다.

    북한은 1958년 FIFA에 가입했으며 AFC에는 1966년 정식 가입했다. 대한민국이 FIFA에는 1948년 5월21일, AFC에는 1954년 5월8일 가맹했으니 FIFA는 10년, AFC는 12년 늦게 가입한 것이다.

    1964년 동경 올림픽은 남북 축구계가 본격적으로 냉전을 개시한 시발점이 되었다. 1964년 동경 올림픽 축구종목은 당초 북한과 이탈리아가 포함된 16개국으로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이탈리아가 프로선수 참가 문제로 퇴출되고 북한은 육상과 수영선수 자격 시비 때문에 선수단을 철수 시켜 14개국만이 참가하였다. 북한 선수단이 철수했음에도 북한 심판이 대회에 참가해 대한축구협회가 일본축구협회 측에 강력 항의하는 등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당시의 대한축구협회는 북한과의 축구 경쟁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특히 1966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예선은 한국이 북한의 FIFA 가맹에 항의하며 기권, 호주와 예선전을 벌인 북한이 아시아 대표에게 주어진 1장의 티켓을 가져갔다.

    북한은 63년부터 3년간 약 30회 국제 경기 경험을 쌓았다. 훈련 초기인 63년 당시 아시아 최강이던 버마에 0-3으로 진 것을 빼고는 무패였다. 북한 선수단 65명은 66년 6월 30일, 잉글랜드 월드컵 본선 참가국 중 맨 먼저 런던에 도착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이 경기에 임박하여 도착한 것을 반면교사로 삼은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1966년 월드컵에서 8강에 오른 북한은 한국 축구계에 강한 충격을 남겼다. 이는 축구계의 분발을 촉진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당시 아시아 축구계는 우수한 유럽지도자를 영입, 각국이 축구의 수준을 크게 높이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외국인 지도자 초빙 문제는 축구계의 중요한 화두 중에 하나였다.

    당초 서독의 우수한 지도자를 초빙, 대표팀은 물론이고 지도자 교육 강사로 활용하고자 한 계획은 축구계의 지지를 얻고 있었음에도 지지부진이었다. 이미 1964년을 기점으로 축구계에서는 ‘라이센스 발급제도’와 ‘외국인 강사 도입’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문제는 재정이었다. 당시의 축구협회의 재정은 경비문제에 있어서 정부(문교당국)와 체육회의 양해가 필요했던 탓이었다.

    1963년
    FIFA와 AFC는 물론, IOC와 OCA 등 각 부분에서 북한과 냉전이 격화되고 있던 1963년, 한국중고축구연맹이 창립되었다, 중고축구연맹은 1964년 여름부터 독자적인 기술 강습회 개최하기 시작하며, 축구 지도자들의 다양한 교육 수요를 채워주기 시작했다. 1960년 아시안컵을 개최하며 신축된 효창운동장은 지도자 교육의 새로운 메카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중고축구연맹의 지도자 강습회는 주로 방학기간인 7월에 효창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1964년
    1964년 12월에는 대한축구협회 이사를 역임한 김덕준씨가 서독축구협회의 초청을 받아 한국인 최초로 축구 유학을 떠났다. 뒤스부르크 헤네프의 축구학교에 입교한 김덕준씨는 또한 한국인 최초로 독일 지도자 라이센스를 취득하기도 했다.
    1965년
    문교부는 1965년 2월 체육담당 장학관 회의를 통해 국민학교에 구기 종목을 장려, 보급하기로 결정한다. 격화되는 남북의 스포츠 경쟁과 더불어, 초등학교 구기 종목의 보급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흐름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는 축구 지도자의 질적, 양적 성장이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맨 처음 현대적인 지도자 강습회를 도입한 것은 대한체육회였다. 대한체육회는 1964년 12월15일부터 17일까지 3일간 멕시코 올림픽 대비 지도자 강습회를 실시하였는데 당시에도 인기 종목이었던 축구도 강습회 종목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급수별 지도자 자격증 체계를 도입한 것도 대한체육회였다. 대한체육회는 1965년 12월20일부터 30일까지 코치론, 트레이닝 방법론, 기능학, 스포츠 생리, 스포츠 심리, 보건관리, 윤리, 세미나 등으로 구성된 C급 지도자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대한체육회의 목표는 이 급수별 지도자 자격증 체계를 1년에 3번 개최하고 국가대표팀을 지도하는 지도자는 모두 이 자격증을 취득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이는 올림픽, 아시안게임 등에 참가하는 종목의 지도자들을 국제수준에 합당하도록 교육하려는 의도였다. 다만 문제는 축구계와 농구계, 그리고 당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복싱계에서도 이러한 대한체육회의 결정에 강하게 반발하였다는 것이다. 66년 2월 23, 24일에 있었던 C급 지도자 자격 테스트는 심지어 일부 족목의 경우 당당히 교재를 펴 놓고 시험을 보는 등의 급수별 지도자 자격증 도입 초기의 혼란이 극심했다.

    축구계에서는 국가대표를 지도하는 지도자로 자격증 이수 대상이 되어있었던 지도자들이 참가를 거부하기도 했다. 참가를 거부하는 논리는 연륜과 경기경험에서 뛰어난 자신들을 누가 검증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런 축구계의 구태에 당시 여론은 싸늘한 냉소를 보냈다.
    1966년
    이러한 구태의연한 모습 뒤에는 당시 축구계의 해묵은 반목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1966년 9월에는 대표팀 선발을 둘러싼 축구계의 내분을 수습하고자 경향신문 주최의 강습회(축구계몽 강연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축구 지도자의 인성 문제에 대한 교육을 위해 시도된 강습회였다.

    체육회에서도 축구를 ‘재건종목’으로 분류할 정도로 한국 축구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1966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의 축구의 졸전은 연이은 집행부 총사퇴의 원인이 되었다.
    1967년
    1967년 8월10일부터 26일까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에서 열리는 AFC 지도자 강습회에 이기주, 박경호, 장운수 3명의 지도자가 파견되었다. 당시 AFC 지도자 강습회의 강사는 후에 일본 대표팀 기술고문으로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동메달을 지도하게 되는 독일인 크라머씨였다.

    1967년 12월 22일 FIFA 순회 강사로 활동하던 데트마어 크라머씨의 추천으로 서독에서 축구 지도자 에크하르트 크라우츤(Echhard Krautzun)을 초빙하였다. 크라우츤은 청소년대표의 지도 외에도 지도자 강습회의 강사로도 활동하였다.
    1968년
    2월27일부터 3월3일까지 6일간 태릉선수촌과 육사구중에서 크라우츤씨를 주강사로 코치 지도자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4월에는 제10회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의 개최를 기념하여 FIFA 아시아 순회 강사를 맡고 있던 크라머씨가 방한 AFC 주최로 지도자 강습회를 실시하였다.
    1969년
    1969년 7월15일부터 10월18일까지 3개월간 일본국 치바현 게미가와 동경대학교 연수센터에서 “아시아를 위한 제1회 FIFA 코칭 스쿨”이 개최되었다. 당시 FIFA 회장이었던 스탠리 라우스는 아시아 지역 축구 발전을 위해 FIFA 기술위원이었던 크라머씨를 배치하였다. 크라머씨는 서독 쾰른체육대학과 동독 아이프치히 체육대학의 8개월, 7개월짜리 코칭 코스를 모델로 3개월간 440시간의 강의와 11시간 실기의 집중 과정을 기획하였다. 대한축구협회는 여기에 박경화, 최영근, 최광석 등을 파견, FIFA 코칭 라이센스를 취득케 하였다. 한편 이 코칭 스쿨에는 한국 4명, 일본 12명은 물론, 자유중국(대만),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 파키스탄, 베트남, 이란에서 지도자들이 참가하여 약 40여명이 영어로 강의와 실기를 진행하였다.
  • 1970~1979재도약기,再跳躍期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해서는 지도 면이 강조되어야 한다" 지도자 육성이 축구계의 우선 과제임을 분명히 함

    1964년 동경 올림픽에서의 졸전은 한국 축구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반면 1966년 북한의 월드컵 8강, 더불어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일본이 동메달을 획득한 것은 한국 축구에 대한 실망감을 배가 시켰다. 그러나 1965년부터 시작된 ‘한국축구 재건’ 운동은 1970년 장덕진 회장 집행부가 들어서기까지 혼미의 길을 걸었다.

    장덕진 회장 치세에 금융 및 보험사를 중심으로 축구단이 창단되기 시작했으며, 킹즈컵과 메르데카배의 우승, 벤피카 초청경기 등으로 축구 붐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상비군 제도 등의 도입으로 이회택 등 시대를 풍미한 축구 아이돌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역시 지도자 육성에 대한 축구계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당시 이시동 축구협회 부회장은 “동남아의 모든 나라가 한국과 같이 상비군 창설, 외국인 코치 초빙으로 수준이 향상되고 있다.”며 한국축구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동남아에 대한 경계심을 높여나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AFC에 가맹되어 있었던 탓에 월드컵이나 올림픽 진출에 있어 큰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당시 축구계에서는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해서는 지도 면이 강조되어야 한다”(장경환)고 지도자 육성이 축구계의 우선 과제임을 분명히 했다.

    1970년
    장덕진 신임 축구협회회장은 축구지도자의 양성과 우수선수 배양을 목적으로 축구학교(축구인의 집)을 설립하여 강습회 및 교육의 거점으로 활용하기로 공약하였다. 연습장과 강의실, 숙소가 포함되어 있어 현대적 의미의 트레이닝 센터의 효시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신임 집행부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6월22일 축구 국가대표 상비군인 청룡과 백호는 물론 청소년 대표팀 강화훈련을 위한 ‘상비군의 집 (건평 100평, 방 20개, 서울시 성동구 구의동 113의1)이 개관 되었다.

    1월6일~19일까지는 부산에서 국민학교 축구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축구지도교사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10개시도 교육위에서 10명씩 추천을 받아 100명의 교사를 대상으로 강습회를 실시하였으며 후에 교육 참가자에게 대한축구협회에서는 훈련에 쓸 축구공 2개씩을 증정하였다.

    또한 방학기간인 8월3일~15일까지 지방 초중고 축구교사 강습회 개최하였다. 10개시도 교육감 추천을 받은 100명의 교사들에게 이론 36시간, 실기 24시간, 계 60시간의 강습회를 실시하고 차상급 지도자 자격증을 발급하였다.
    1971년
    3월 영국인 지도자 그래엄 애덤스(영어: Graham Adams, 1933년 3월 1일)를 뮌헨 올림픽 남자 국가대표 축구팀의 코치 및 지도자 교육 강사로 위촉하며 연봉 오천오백 파운드에 계약하였다. 플리머스 아가일FC, 옥스퍼드 유나이티드 등에서 선수로 활약한 그래엄 애덤스는 1966년 북한대표팀을 지도하여 북한의 잉글랜드 월드컵 8강에 조력한 바 있었다.

    9월 29일 FIFA 회장 스탠리 라우스 경이 뮌헨올림픽 예선 참관 차 서울을 방문한 자리에서 말레이시아에서 72년 1월부터 3개월간 FIFA 코칭 스쿨을 열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1972년
    전국 순회 축구 지도자 강습회가 시작되었다. 그 첫 강습회로 1월27일~29일까지 강원 춘천고에서 그래엄 애덤스가 주강사를 맡고 장경환씨가 보조강사로 나서 강원도 지역 지도자 50명에게 강습회를 실시하였다. 이후 2월 11일부터 13일까지 인천 공설운동장에서 인천지역 지도자를 대상으로 강습회를 실시하였다. 그래엄 애덤스는 계약 만료로 한국을 떠나며 “전국 규모의 리그제를 실시하고 지도자를 우선 육성해야 한다”고 한국축구 발전을 위한 고언을 남겼다.

    2월1일부터 5월10일까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에서 3개월간 FIFA가 개최한 아시아지역 코칭 스쿨에 정종덕 당시 안양공고 감독을 파견하였다.
    1973년
    겨울방학 기간인 1월7일에서 13일까지 부산에서 전국의 체육교사 및 일선코치들을 대상으로 강습회를 실시하였다. 강사는 최영근, 박경화 협회 기술위원. 당시 전국 지도자 강습회는 전국을 3개 지역으로 나누어 경기, 강원, 서울은 경신고, 동대문중, 중대부고 운동장에서 진행하였으며 충청과 호남지방은 대전동중에서 하루에 5시간씩 7일간, 35시간의 교육시간으로 진행하였다. 여름 방학중에는 동일한 패턴으로 7월29일부터 8월17일까지 서울, 대구, 대전에서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1974년
    11월 새로이 취임한 아벨란제 FIFA 회장이 FIFA의 축구 보급 사업의 일환으로 유력 기업(코카콜라)와 함께 세계 순회 강습회를 개최할 계획을 발표. 총 예산은 4백만 달러. 5명의 강사로 구성된 순회 강사들이 75년 4월부터 세계 각국을 방문하여 FIFA의 지도자 강습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1975년
    겨울방학 기간인 1월12일에서 30일까지 김용식 선생을 주강사로 전국 순회 지도자 강습회를 실시하였다.

    7월5일에서 8월26일까지 동독 라이프치히에서 개최된 FIFA 축구지도자 강습회에 대표 1명을 파견하였다. IOC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공산권에 대한 스포츠 외교의 일환으로 승인되었다.
    1976년
    1월12일 경기, 강원 지역을 시작으로 1월26일까지 충청, 전라, 부산, 경남, 제주를 망하라는 순회 축구 강습회가 개최되었다. 주 강사는 김용식 선생으로 김화집씨가 심판 교육을 함께 실시하였다.
  • 1980~1993아시안게임과 올림픽, K리그, 데트마어 크라머

    유능한 외국인 지도자를 초빙하여 대표팀의 경기력을 향상시키고 국내 지도자들의 수준을 높이려는 다양한 노력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시도

    1981년 9월30일,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1988년 올림픽의 개최지로 서울이 결정되었다. 또한 그해 11월26일, OCA(아시아 올림픽 평의회)는 바그다드와 평양을 제치고 서울을 1986년 아시안게임의 개최지로 선정한다.

    아시안게임은 원래 대한민국 서울에서 1970년 개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경제난과 북한의 위협으로 개최권을 1966년 태국에게 넘겨주어야 했던 불운의 대회였다. 이로써 서울 올림픽의 전초전으로 아시안게임이, 그리고 동서 냉전 종식의 상징이 된 88올림픽의 대한민국 개최가 결정되었다.

    대한민국 축구계로서는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대표팀 강화와 축구 보급, 확산이라는 시대적 소임을 다 해야 했다. 유능한 외국인 지도자를 초빙하여 대표팀의 경기력을 향상시키고 국내 지도자들의 수준을 높이려는 다양한 노력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시도된다.

    1983년, 슈퍼리그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K리그는 창설될 때 프로 팀 2개(유공, 할렐루야)와 실업 팀 3개(대우, 포항제철, 국민은행)를 묶어서 5개 팀으로 시작되었다. 88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와 함께 축구는 K리그를 중심으로 산업화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최순영, 김우중 회장 체제로의 권력교체기를 거치며 기존 행정업무의 연속성이 뒷받침 되지 않아, 아시안게임, 올림픽, 슈퍼리그 출범과 함께 시도되었던 많은 도전들이 중도에 중단 되거나 사라지는 비운을 맞이하기도 했다.

    특히 1983년의 라이센스 제도 도입과 외국인 기술고문(베른하르트 즈골)의 초빙, 1991년 크라머씨의 기술고문 위촉은 매우 혁신적인 도전이었다. 크라머씨의 내한과 함께 FIFA의 공인된 축구 지도자 코스가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열리는 등, 지도자 교육과 육성은 그 꽃을 피우는 듯 했다.

    라이센스 제도에 대한 반발은 결국 이를 다시 후퇴시켰으며 국내 축구계의 폐쇄성, 파벌주의, 크라머씨의 역할에 대한 몰이해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중도에 크라머씨와의 결별을 확정짓는다. 그는 후에 "한국이 나를 왜 선임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남겨 당시 한국 축구계에 대한 섭섭함을 드러냈다.

    당시 선수로 크라머의 가르침을 받은 서정원 수원삼성 감독은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 중 한명으로 크라머씨를 거론하며 "지금의 위치까지 오르기까지 크라머 감독님의 열정과 축구철학, 지도철학이 절대적"이라고 그의 죽음(2015년 서거)을 애도한 바 있다.

    1983년

    전국 순회 축구 강습회 강사로 서독 국적의 폴란드인 지도자 베른하르트 즈골을 기술고문으로 초빙하였다. 폴란드1부 고르니크 팀 감독 출신, 대한축구협회에서 차와 아파트는 물론 개인비서와 사무실도 제공하는 파격적인 대우가 이어졌다. 당시 베른하르트 즈골은 서독정부에서 급여도 받고 협회에서도 월 500달러의 활동비를 제공받는 조건으로 대표팀 강화와 지도자 육성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또한 서독의 예를 참조하여 지도자 자격증 등급제를 도입하였다. KFA A [실업, 대학], KFA B [고교], KFA C [중학], KFA D [국교]로 구분된 지도자 자격증 체계로 서독의 라이센스 체계를 그 모델로 하였다. 1983년부터 라이센스 교육을 이수하지 않으면 무자격 지도자가 되도록 강제하였다. D에서 C, B로의 승급은 자격 취득 후 기본적으로 2년의 실제 지도 이력을 강제하였으며, A라이센스는 지도방법론, 생리학, 해부학, 심리학을 6개월간 강의를 듣고 각각 시험을 거쳐야 획득 가능하도록 하였다.

    1984년
    3월2일, 3일 양일간 대한축구협회는 축구 기록 강습회를 최초로 실시하였다.

    또한 8월에는 서독축구협회가 외국 국적자들을 대상으로 헤네프에서 개최한 A 라이센스 지도자 강습회에 박종환 감독이 참여하였다. 외국인 지도자 대상 교육에 참가한 박종환 감독은 스포츠슐레에서 하루 6시간씩 실기와 이론 강의를 소화하였다.

    12월28일에는 축구발전을 위한 지도자 세미나가 한양대 종합실내체육관에서 개최되었다. 김정남 감독이 “멕시코 월드컵 및 아시안게임 참전기”, 최은택 감독(협회 기술위원장)은 ‘지도자 강습회에 관한 방향제시’등의 주제로 주제발표를 진행하였다.
    1989년
    차범근씨가 서독 쾰른대학교 축구지도자 교육코스를 9월28일 이수하고 서독축구협회 1급 지도자 자격증(A라이센스)을 취득하였다. 여기에는 바이에른 레버쿠젠 감독으로 재임 한 데트마르 크라머씨와의 인연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당초 슈퍼리그 출범 이후 대우로얄즈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차범근 선수. 당시 레버쿠젠의 감독 크라머씨는 차범근의 진로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당시 대우 로얄즈 단장 이재명씨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차범근 선수는 내 아들 처럼 사랑하고 있다. 경력 말미에 분데스리가 코치 자격증을 딸 수 있도록 노력하겠으니 (스카우트를) 참아달라”라고 고언을 하며 차범근의 국내복귀를 만류한 일이 있다. 실제로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명문팀 뉘른베르크를 마다하고 레버쿠젠으로 이적한 이유를 감독 데트마르 크라머 때문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1990년

    FIFA 순회 강사 데트마르 크라머씨가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앞두고 국가대표팀 자문 및 총감독으로 초빙되었다. 2년의 계약. 계약 기간 동안 크라머씨는 지도자 강습회 강사는 물론 올림픽 대표팀등 각급 대표팀의 기술고문 자격으로 총감독 역할을 수행 하였다. 12월26일부터 30일까지 4일간 한양대학교 체육관에서 전국 초중고대 실업 지도자 150명을 대상으로 박경화, 최은택 등 8명의 강사가 지도자 강습회를 열였다.

    1991년
    국내최초의 FIFA 인증 코칭 코스가 시작되었다. 여름방학 기간인 7월 25일부터 8월6일까지 크라머씨를 주 강사로 1차 강습회를 경희대학교에서 개최하였다.
    1급 자격증 소지자를 대상으로 한 이 교육은 이수하지 않을 경우 자격을 유보시키는 필수 강의였다.
  • 1993~20022002 한일 월드컵

    아시아 축구연맹 AFC의 라이센스 제도를 도입, 과거에 비해 진일보한 지도자 교육체계를 완성

    1993년 1월 취임한 정몽준 회장은 2002년 FIFA 월드컵 개최를 선언하였다. 3년 뒤인 1996년 5월 31일, FIFA는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를 만장일치로 결정하게 된다. 축구계는 이를 기회로 해묵은 반목과 갈등을 일단 덮어두고 2002년 월드컵 개최라는 단일 목표로 매진하게 된다. 2002 월드컵을 앞두고 파주 NFC가 완공되는 등 인프라와 국제화에서 대한민국 축구는 장족의 발전을 거둔다. 또한 아시아 축구연맹 AFC의 라이센스 제도를 도입, 과거에 비해 진일보한 지도자 교육 체계를 완성하게 된다.

    1993년
    대한축구협회는 제5회 AFC(아시아축구연맹) 코치강습회(10월11-25일,카타르)에 배재고 박경화 감독을 파견키로 결정 했다.

    7월1일 변경된 규정에 따라 기술지역(테크니컬 에어리어)이 최초로 설치되었다.

    12월 7일 1992년 결별한 크라머씨를 대신하여 월드컵 축구대표팀의 기술자문으로 선정된 러시아의 아나톨리 비쇼베츠씨가 내한. 대한축구협회는 비쇼베츠씨를 크라머씨와 마찬가지로 월드컵 대표팀의 기술자문 외에 청소년팀 지도와 지도자 강습회 강사 등으로 활용하기로 한다.

    1월 21일부터 30일까지 울산과 서울에서 전국 축구지도자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협회는 일선 지도자들을 고등부, 대학부, 일반부와 초등부, 중등부, 여자부 등 2개 그룹으로 구분해 고등부 이상은 21일부터 25일까지 울산에서 초,중등부와 여자부는 26일부터 30일까지 서울에서 각각 5일씩 이론과 실기를 병행한 강습회를 실시하였다.
    1997년
    2월12일에서 22일까지 네덜란드 강사 아브라함 브람을 초청, AFC와 공동으로 유소년(6~12세) 지도자 24명을 대상으로 경기도 이천에서 코칭 클리닉을 개최하였다.

    나이키월드투어의 일환으로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갖기 위해 방한한 브라질 대표팀의 자갈로 감독이 8월6일 리츠칼튼 호텔에서 국내지도자를 대상으로 원포인트 지도자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강습회에는 프로축구 전남 드래곤즈의 허정무 감독과 전북 현대 최만희감독, 유니버시아드대표팀 김호곤감독 등 지도자와 선수 50여명이 참가했다.

    9월9일부터 11일까지 아디다스 코리아의 초청으로 방한한 코오버코칭 트레이닝팀이 대전, 부산, 포항 등지에서 초중고, 대학 축구팀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코오버코칭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초급지도 인력을 배출하기 위해 대한축구협회는 12월16일부터 20일까지 동계 축구 지도자 강습회를 효창운동장에서 개최, 무자격자를 대상으로 무료로 진행되었다.
    1998년
    FIFA가 주관하는 올림픽 솔리더리티 강습회가 10월22일부터 31일까지 고양시 현대자동차 연수원에서 개최되었다. 강사는 홍콩 국가대표팀 감독 출신 곽가밍씨. 시도협회에서 추천받은 축구지도자 40명을 대상으로 교육이 진행되었다.
    1999년
    대한축구협회는 1월7일 서울 타워호텔에서 이사회를 열어 모든 지도자는 벤치에서 지도자 자격증을 패용할 것 등을 심의 의결하였다.

    FIFA가 주최하고 코카콜라가 후원하는 FUTURO 강습회가 5월18일부터 23일까지 고양시 현대자동차 연수원에서 개최되었다.
    2001년
    11월 9일 파주NFC가 개장식을 가졌다.
    2001년 이후의 지도자 교육의 역사는 표로 갈음한다.
    2001년 이후 지도자 교육 역사 리스트
    년도 내용 비고
    1999 AFC B 라이선스 교육 시작 총 22명의 코치가 강습회 참가
    AFC C 라이선스 교육 시작 총 16명의 코치가 강습회 참가
    2000 AFC A 라이선스 교육 시작 총 24명의 코치가 강습회에 참가
    AFC 국제 자격증 도입 시작
    2001 AFC P 라이선스 교육 시작 총 3명의 코치가 강습회에 참가
    AFC 강사 교육 시작 총 9명의 신임 강사를 배출 (AFC 강사 Roberts Alberts 계약)
    2002 보수교육 세미나 시작 120명 지도자 대상 최초 보수교육 세미나 개최
    2003 KFA GK 2급 교육 시작 총 25명의 코치가 강습회 참가
    2004 KFA GK 1급 교육 시작 총 25명의 코치가 강습회 참가
    2005 KFA강사교육 AFC 강사 초청(Morteza Mohases) 14명의 강사 배출
    2006 AFC P급 국내 자체 위탁 교육 실시 총 14명의 P급 국내 지도자 배출
    KFA컨퍼런스 개최 427명 지도자 대상 컨퍼런스 개최
    2007 풋살 level1 교육 시작 총 11명의 코치가 강습회 참가
    축구 이론 총서 출간 심리, 영양, 의학, 생리 총 2천부
    KFA 필드(A,B,C급) 자격증 AFC 자격으로 전환교육
    축구 동영상 훈련교재 (DVD) 10개 세트
    2008 유소년/청소년 축구교본(2권) 출간 총 2천부
    Football Programmation annuelle d’entainement 출간 총 4천부+동영상DVD 1천개
    2009 KFA D 라이선스 교육 시작 10회에 걸쳐 총 354명의 코치가 강습회에 참가
    GK Level 3 교육 시작 2회에 걸쳐 총 28명의 코치가 강습회 참가
    2011 FIFA MA 교육 시작 총 24명의 코치가 강습회에 참가
    2012 KFA GK 3~1급 자격증을 AFC GK(Level 1~3) 자격으로 전환교육
    2013 Fitness 코스 시작 총 24명의 코치가 강습회에 참가
    2014 미래 축구 서적 발간 영국 서적 번역서 1천권 및 DVD 5백개
    2015 온라인 아카데미 구축 통합 지도자 교육 온라인 서비스 실시